본문 바로가기

kh's IM Leader Interview

이강우 선생님

국내 최초 CM플래너에게 광고의 길을 묻다 이강우 선생님

오리온 초코파이 정, 고향의 맛 다시다, 맞다 게보린, 따봉 등 이런 단어들만 들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고가 하나씩 있을 것이다. 이 광고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CM플래너였던 이강우 선생님이 담당했던 대표적인 작품이다. CM플래너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세종의 이강우가 하는 일’로 불려졌을만큼 광고기획자로 활발히 활동했다. 광고계 원로인 이강우 선생님을 만나 광고의 길에 대해 직접 물어봤다.

정리. 신건우 기자 gw@websmedia.co.kr 
진행. 한기훈 ‘한기훈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소’ 대표 khhan60@gmail.com 
사진. 포토그래퍼 김주선






국내 최대 TVCF 프로덕션이었던 세종문화를 공동 창업한 광고계 원로이자 국내 최초 CM플래너와 인터뷰할 수 있어 오늘 자리가 뜻깊다. 먼저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본인 소개를 하기에 인생이 아주 단순했다(웃음). 어찌 보면, 46년 동안 굉장히 단조롭고 따분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평생동안 다닌 직장이 딱 세 군데 밖에 없었다. 동아방송, 세종문화, DDB.
연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방송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로 13년 동안 근무했다. 그중 2년을 CM광고 PD로 일하다, 광고를 시작해 1977년 세종문화라는 회사를 공동 창업했다. 그 후, DDB에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입사를 해서 10년 근무 동안를 했다. 그 이후부터는 백수로 지내고 있다(웃음). 그 외에 현업에 있으면서 아주 오랫동안 국민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이후에 한양대학교, 세명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25년 정도 강의를 했다. 강의도 작년까지가 마지막이었다.

처음 광고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정말 우연한 기회로 광고를 시작하게 됐다. 동아방송에서 사회•교양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드라마 분야에서 8년 정도 일을 했다. 당시만해도 라디오 드라마 PD는 인기 있는 직종 중 하나였다. 그러다 갑자기 1975년도에 CM제작부로 발령이 났다. 동아방송 라디오 CM은 대부분 MBC와 TBC에서 제작된 것을 송출하는 정도여서 중요한 자리가 아니였다. 일단 가게 된 거 동아방송 라디오 CM을 별 볼일 있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는 도전의식이 생겼다. 동아방송의 유능한 전속성우와 함께 2년 동안 많은 라디오 CM을 제작하게 되면서 성공적으로 라디오 CM PD로 활동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 라디오 CM을 제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1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괜찮은 일을 했던 한 해였던 것 같다.

대단하다. 광고의 불모지를 성지로 만들다니!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라디오 CM PD를 그만두고 TVCF 프로덕션을 창업하지 않았는가?
동아사태를 겪으면서 평생 직장으로 여겼던 동아방송 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TV가 활성화되는 시대 변화와 라디오 CM PD로서 활동을 바탕으로 TVCF 프로덕션인 세종문화를 이지송 감독과 함께 창업했다. 그리고 1년 후 오리콤 제작국장이던 윤석태 씨가 합류해, 세 명이서 일을 하다 이지송 감독은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게 됐다. 동아방송이 내 인생의 첫 번째 기회였다면, 광고를 직업으로 선택하게 된 건 내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세종문화는 50명의 직원이 5개의 제작팀으로 활동하며, 연간 100편의 광고를 만드는 국내 대표 프로덕션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로 오리콤과 제일기획 등 광고회사와 함께 일을 하며, 식품, 화장품, 전자, 생활용품 등 다양한 영역의 광고를 제작했었다.
특히, 내 광고인생에서 윤석태씨를 만난 건 가장 큰 행운이었다. 20년 넘게 감독과 플래너로서 함께 일하면서 광고뿐만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호흡이 잘 맞았다. 가끔은 서로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었지만, 단 한번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은 적이 없었다. 요즘도 가끔 만나지만 아마도 윤석태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강우가 없었을 것이고 이강우 없는 윤석태 또한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가진 1의 재능을 자신이 가진 99의 재능과 똑같이 생각하며 서로를 신뢰했다.

사실 지금이야 프로덕션에 기획자가 많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세종문화에서 CM플래너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당시 TVCF 프로덕션은 감독과 촬영감독만 있어도 잘 운영되는 구조였다. 감독 중심 시스템이다 보니, 따로 CM플래너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 촬영을 나간 감독을 대신해 광고주 미팅을 참석하게 됐고,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광고주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광고안이 만들어지다 보니, 새로운 효율성과 전문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후일에는 ‘세종의 이강우가 하는 일’로 불리며 영상 기획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기획자의 필요성이 주목 받았고 CM플래너라는 용어는 90년 이후로 생겨났다. 

선생님이 플래너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광고 작품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애정을 가진 작품을 뽑자면 우선, ‘고향의 맛 다시다’를 들 수 있겠다. 한국적 정서를 담은 캠페인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여러 해 담당 플래너로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리고 ‘오리온 초코파이 정’도 있었다. ‘정’ 캠페인을 통해서 초코파이를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감정을 담은 제품으로 만들었던 작품이다. 지금까지도 캠페인이 이어져 올 정도로 성공한 작품이었다.
‘경동보일러’ 광고 대사인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래하지 않은 캠페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기억을 해줘 감사하다.
또한, 보람됐던 광고는 ‘맞다 게보린’ 광고였다. 게보린 약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광고를 담당했다. 당시 작은 제약회사였던 삼진제약이 이 광고를 통해 중견회사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광고는 ‘델몬트 주스’다. “따봉”이라는 말을 전국적으로 히트시킨 작품이었는데, 광고가 나가고 3개월 만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국내에 “따봉” 열풍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판매실적이 드라마틱하지 않아 마케팅적으로는 실패냐, 성공이냐 말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광고 한 편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깨닫게 된 계기가 됐고, 광고의 책임을 알게 된 작품이었다.

아직도 사람들에게 생생히 기억되는 광고들이다. 선생님은 어떤 방식으로 광고 방향을 잡는지 궁금하다.
가장 먼저 나 자신과 내 가족을 통해서 소비자 욕구를 생각한다. 그리고 주변을 본다. 상품이 판매되고 있는 현장을 자주 가 본다. 바로 그곳에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 욕구와 상품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광고라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욕구가 있는지, 어떻게 말하는지 소비자의 언어 속에서 카피를 찾았다. “맞다, 게보린”, “따봉”,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 “011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등 광고를 기획할 때 카피를 먼저 생각했다.
또한 남이 만든 광고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아이디어의 단서를 찾기도 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고, 시집도 카피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품과 소비자에 대한 충분한 스터디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선생님이 활동했던 80~90년대 광고 시장은 어떤 모습이었나.
80년대는 영상 표현의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TV가 컬러화되면서 영상의 색감, 분위기 등 영상 표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시대였다. 70년대가 CM 송을 중심으로 청각적인 요소가 히트를 했던 시대라면, 80년대는 영상미를 우선하는 시대였다. 광고의 내용보다는 영상의 수준에 따라 광고가 판단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두 자릿 수의 성장을 기록하던 때라서 상품들은 잘 팔려 나갔다. 사실 광고만 하면 팔리던 시대였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광고업계에 들어와서 느낀 기분은 ‘왜 모든 광고의 표현 형식이 똑같을까?’였다. 방송에서 사회•교양과 드라마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또는 코미디적인 요소를 활용해 새로운 시도들을 했다. 그런 새로운 시도가 CM 플래너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90년대는 광고가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된 시대였다. 광고에 따라서 상품의 판매가 좌우됐기 때문이다. 자연히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다양한 광고의 포맷이 개발됐고, 소비자의 생활과 심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90년대 후반 IMF를 겪게 되면서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였다. 광고가 드라마틱해지고,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 다양해졌다. 소위 마음에 소구하는 광고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러다 1999년에 23년 동안 운영한 세종문화를 정리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느 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고 한 편이 등장했다. 바로 ‘TTL’ 광고였다. “스무 살의 011 TTL”이라는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 광고의 파급력을 알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광고는 제품을 소개하는 데 집중해왔다. 하지만 이 광고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처음 이 광고를 접했을 때 잘못 만든 광고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TTL’은 온라인 시대를 남보다 빨리 발견하고 그런 흐름을 광고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광고였다. 젊은 학생들은 TTL 광고를 보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면서 능동적인 활동을 하게 됐다. 커뮤니케이션의 개념과 방법이 다른 시대가 왔음을 선언한 광고였다. 바로 온라인 시대가 온 것이다. 온라인의 등장은 미디어의 개념과 역할, 커뮤니케이션의 방법, 소비자의 의식 등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 광고를 보고 광고인으로서 나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또 23년 동안 광고 프로덕션 일을 하면서 생긴 피로감과 맞물려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일찍 판단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들 때도 있다(웃음).

DDB 고문으로서 10년 동안의 활동은 어떠했나.
솔직히 부끄러웠다. 시대의 흐름이 변하면서 내가 실무적으로 도움될 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보람을 찾자면 여러 가지로 좌절감을 느끼는 후배들에게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는 선배였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광고 일을 하며 느꼈던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서 수필 형태의 광고 책을 두 권 썼다는 것이 보람된 일이었다.

오랫동안 광고 현장과 DDB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국내 광고계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우리나라는 광고산업은 있으나 광고 시장이 없는 나라다. 철저한 능력 중심의 경쟁체제가 돼야 한다. 재벌 그룹의 광고회사가 있는 한 개선이 어렵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핵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질적인 발전과 더불어 비즈니스 발전이 있어야 하지만, 대기업이 백그라운드로 한 발전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광고 비즈니스가 철저하게 공정한 경쟁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오히려, 현재의 온라인의 시대가 대기업을 백그라운드하고 있는 메이저 그룹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광고회사가 생겨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에 대한 관찰은 기본적으로  꼭 가져야 하는 중요한 소양이다.  본질과 수사를 혼동하지 말고,  잘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광고인은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 광고는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미래에는 광고와 프로그램, 광고와 기사의 구분이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PPL 광고와 신문의 섹션 기사로 현실화되고 있다. 미디어와 광고가 지금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에는 방송국 편성표에 시청자가 매여 있었지만, 이제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시간에 아무 때나 TV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들이 살아남기는 어려운 시대가 됐다. 시청자들이 광고를 스킵해버리니 다른 방법으로 광고를 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제는 광고가 시청자들이 보는 프로그램 속으로 진입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이것은 TV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도 동일하다. 얼마만큼 프로그램 속에 광고적 요소가 녹아 있느냐가 관건이다. 요즘은 TV가 PPL 형태로 시작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본격화될 거라고 본다.
신문도 섹션에서 얼마만큼 기사처럼 광고적인 내용을 쓰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광고가 광고주의 정보전달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이익이나 편익을 생각해서 광고적인 정보를 얹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들이 수용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 광고가 따로 분리되지 되지 않도록 연구하는 것이 미래의 광고를 위해 필요한 생각이다.

일반적인 광고가 약화되는 시대에서 광고회사는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제는 광고회사가 광고만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광고회사라는 게 기본적으로 의존적 비즈니스다. 자신의 책임과 관계없이 광고주가 잘못되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운명을 다른 사람이 쥐고 있는 믿기 어렵고, 미래가 밝지 않은 비즈니스다. 또한, 4대 매체 시대의 광고회사는 광고효과의 측정이 가능했고, 소득의 구조가 단조롭고 확실했다. 광고를 하면 일주일 내로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났고, 바로 피드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매스 미디어의 시대에서 SNS와 같은 퍼스널 미디어 시대로 변화했다. 오히려 해야 할 업무는 증가해 직원들이 많이 필요한데, 소득은 적어지는 언밸런스가 발생한다. 이런 측면에서 광고회사는 특별한 독자 비즈니스를 개발하지 않는 한 조직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창의성이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 광고회사가 광고라는 카테고리 안에만 있지 말고, 시야를 더 넓혀야 한다. 지금도 몇명 광고회사가 카페나 출판, 영화로 비즈니스 분야를 넓히고 있다. 이러한 창의성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비즈니스 영역으로 더욱 확장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분야를 찾아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대가 계속 바뀌어도 광고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요즘 세상은 광고를 포함해서 모든 영역에서 숨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다. 하지만 패션은 변하고 시대사상도 조금씩 변하지만,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광고에서도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중요한 생각이다. 가끔 롱런하지 못하는 크리에이터들을 보면, 사람의 패션과 같은 외적인 것을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패션이나 외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게 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에 대한 관찰은 기본적으로 꼭 가져야 하는 중요한 소양이다. 본질과 수사를 혼동하지 말고, 잘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광고인은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

현재 광고계에서 일하는 후배들을 위해 선배로서 조언 한마디 부탁한다.
요즘 광고는 인기가 없는 직업이 돼 가고 있다. 광고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광고주로 가고 싶지, 광고회사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광고회사는 들어가면 밤새도록 일하고, 거기에 따른 보상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으며, 정말 광고에 미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요즘 광고 일은 힘들기 만한 기피 업종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선배 광고인들, 지금 광고업계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보상이 안 주어지니깐 젊은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말 철저한 경쟁에 따른 결과를 기반으로 보상이진다면, 광고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길 거라 예상한다.
사실 광고는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몇 안 되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매일 매일 새로운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통해 한 기업의 흥망이 좌우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사업이기도 한다. 또 오늘날은 똑같이 출근해서 매일 똑같은 일만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광고는 매일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일이다. 창의적인 일을 한다는 게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런 좋은 점은 잘 알려지지 않고 부정적인 것만 알려져 젊은이들한테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인생 선배로서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광고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에게 꿈을 찾기가 힘들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기업 입사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대기업 회장은 꿈일지 몰라도 입사가 꿈이면 이후에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스스로 꿈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라는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 있는데, 남과 비교하면서 보낸다는 게 너무 허망한 것 같다. 환경을 탓하는 패배적인 생각이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합리한 세상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상황에 낙담하지 말고 시대의 흐름에 맞서, 자신이 먼저 앞장서나가는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창의적인 일을 한다는 게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런 좋은 점은 잘 알려지지 않고  부정적인 것만 알려져  젊은이들한테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이강우 선생님 인터뷰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