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내가 일했던 대홍기획의 초기 모습을 기억해 보면, ‘카피실’이란 조직이 있었다. 카피라이터들만 따로 모아 놓은 조직이다. 카피 실장은 각 카피라이터들에게 클라이언트나 프로젝트를 할당해 준다. 기획팀에서 브리프를 작성해서 카피실로 넘기면 카피라이터가 몇 가지 아이디어를 카피로 작성해서 디자인실로 또는 피디실로 넘겼다. 각 부서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존재했다. AE들에게는 좀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뛰어난 AE들은 실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까지 하기도 했다. 그 때, 카피라이터와 아트 디렉터 간에 팀이란 의식이 없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에 Doyle Dane Bernbach는 이미 일하는 방식에서도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다. Doyle Dane Bernbach에서는 브레인 스토밍이나 그룹미팅이 없었다. 모든 광고는 Artist와 Copywriter가 동등하게 함께 일한 결과로 만들어졌다. “서로 존중하는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충분한 시간을 같이 앉았었지요. 그리고 자유 연상의 단계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로 발전하는 것입니다.”라고 Bob Gage는 말했었다. 아티스트가 헤드라인을 이야기하고 카피라이터가 그림 이야기를 한다. 이런 자유로운 역할 교환 과정을 통해서 광고 작품은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Bob Gage는 그레이 대행사 시절부터 빌 번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밑에서 일했던 아트 디렉터로 Doyle Dane Bernbach 창립 멤버였다.)
함께 일하는 두 사람(카피라이터와 아트 디렉터)은 서로 치열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일했다고 한다. “우리는 밀폐된 방에 안아서 서로가 상대를 죽을 때까지 물어 뜯었죠.” Paula Green의 회상이다. (폴라 그린은 Avis 렌터카 캠페인의 ‘We try harder’란 슬로건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트 디렉터는 진정한 광고쟁이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이는 크리에이티브 팀에게 자기 자신의 작품이라는 책임감을 주게 되었다. 빌 번벅은 “그건 그들 소유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치켜 들고 긍지를 갖고 걷습니다. 카피와 아트의 결합, 이것은 엄청난 혁명이었다. 카피와 아트는 함께 어우러지면서 제3의 더 큰 것을 만들어 냈다.
1950년대 부터 Doyle Dane Bernbach는 이 작업 방식으로 유명한 캠페인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뉴욕의 Ohrbach’s 백화점 광고 캠페인 그리고 이어서 Levy’s 호밀빵 광고, 그리고 Doyle Dane Bernbach의 이름이 점점 알려지면서 폴라로이드 카메라 캠페인, Avis 렌터카 캠페인, 이스라엘 항공, 그리고 마침내 폴크스바겐 캠페인으로 이어지는 광고의 황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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