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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K Story

#18 기억에 남는 캠페인 #18 기억에 남는 캠페인1. 700 서비스 90년대 초반 삼보정보통신을 소개 받고 당시 시작되던 700 음성 서비스의 라디오 광고를 대행하게 되었다. 당시 이 서비스는 마치 황금 알을 낳아주는 거위와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학생들이 라디오 광고를 듣고 이 서비스를 구매하고 그 효과는 즉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소문이 좀 났는지 같은 종류의 사업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라디오 광고를 의뢰해 왔다. 몇 개 회사까지 대행했는지는 잊었으나 많은 회사들의 라디오 광고를 대행하게 되었던 기억은 분명하다. 2. 시공사 책 광고 시공사의 소설들을 라디오 광고로 많이 다루었다. 특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그 당시 인기 드라마에 나오면서 시너지 효과를 가져와서 공전의 히트 소설이 되었었다. 3. 블록 드럭.. 더보기
#16 DDK에서의 IMF 기억 #16 DDK에서의 IMF 기억 미국, 호주에서의 DDB 연수를 마치고 돌아 오니 8월 중순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현지 방송에서는 한국 경제의 어두운 뉴스가 많이 보도되었다. 화면으로는 기아자동차의 노조 파업 등이 보여지면서. 그해 초부터 한보그룹,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 한신공영, 쌍방울 그룹, 기아자동차, 해태그룹, 고려증권, 한라그룹 등이 잇달아 부도를 내거나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아시아 각국의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증시가 폭락했다. 아시아 각국이 달러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12월에는 마침내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자본시장이 전면 개방되었다. 1998년 각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DDK도 세 명을 정리해야 했다. 마침 결혼을 앞 둔 여직원 두 명이.. 더보기
#15 패션광고 전성시대 #15 패션 광고 전성시대 90년대 IMF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패션 산업의 황금기였다. DDK시절 90년대 10년간 담당했던 패션 광고주도 여럿 있었다. 진도그룹의 ‘마리끌레르’ ‘리씨’ 등의 브랜드를 담당했었고, 성도그룹의 ‘제이빔’, ‘톰보이’, ‘톰키드’ 등의 브랜드도 있었다. 그리고 란제리 브랜드인 ‘와코루’ 그리고 Fila도 두 해 담당했었다. 소득이 증가하면서 소비가 고급화 되던 시절이었다. 백화점 매출은 당연히 매년 늘어만 갔다. 초고가 모피 의류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패션 카타로그 제작은 광고회사의 중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 촬영을 위해서 호주로 많이 출장을 갔었다. 계절이 정반대인 것이 가장 큰 메리트였다. 매년 11월 정도에 다음해 봄 여름용 카타로그를 제작하는데 만약 한국에.. 더보기
#14 DDB 연수(4) 시드니 #14 DDB 연수(4) 시드니 6월 중순 LA에서 시드니로 갔다. 콴타스 항공으로 가는데 상당히 장거리 비행이었다. 시드니 공항에 아침 나절에 도착했다. 두 달 예정으로 묶은 숙소는 DDB시드니에서 잡아준 곳으로 하버브릿지 건너 노스시드니 쪽의 밀슨스 포인트 역 부근 키리빌리 아파트먼트였다. 고층의 서비스트 아파트먼트로 루나베이가 아래로 보이고 바다가 보이는 멋진 곳이었다. 노스시드니에 위치한 DDB시드니는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였다. DDB호주,뉴질랜드 지역 회장이던 웨인 킹스턴과 인사하고 여러 매니저들과 개별 미팅을 이어갔다. 여기는 DDB시카고 하고는 많이 다른 광고주 구성을 보여주었다. 우선 DDB시카고가 대형광고주 중심의 단출한 광고주 구성이었던 데 비해서 시드니 오피스는 수없이 많.. 더보기
#13 DDB 연수 (3) 뉴욕 #13 DDB 연수 (3) 뉴욕 DDB 시카고에서의 연수를 마치고 뉴욕으로 옮겨간 것은 1997년 5월 초였다. 시카고를 떠날 때 좀 아쉬웠다. 날씨도 막 좋아지고 있었고 회사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DDB 뉴욕에서의 연수는 1주일로 예정하고 갔다. 사전 연락과 조정과정에서 이미 그들이 내가 가는 것을 귀찮아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중학교 동창 차중렬군이 마중을 나왔다. 맨해튼의 코리아타운의 호텔에 묶었다. 한국식당에서 먹는 한국 음식의 맛이 서울보다 더 좋다고 느꼈다. 맨해튼의 메디슨 애비뉴는 세계 광고의 중심지이다. 메디슨 애비뉴란 거리 자체가 이미 광고회사라는 뜻을 상징할 정도이다. DDB 뉴욕도 역시 메디슨 애비뉴에 있었다. 코리아타운에서 걸어서도 갈 .. 더보기
#13 선진 정보의 습득 #13 선진 정보의 습득 90년대는 한국에서 광고회사의 황금시대였다. 많은 인재들이 광고회사로 몰려들었다. 광고회사, 특히 외국계 광고회사는 선진 정보 습득의 최전선에 있었다. 특히 글로벌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혜택이 바로 최신 정보 접근성이었다. 그리고 과학적인 여러 방법론의 체계적인 교육이 매력적이었다. 90년대 후반 대홍기획/DDK 대표이사를 지낸 故 강정문 대표는 특히 광고기획, 미디어 전략 등 DDB Needham의 선진 노하우를 습득하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이때 DDB Needham의 광고기획 방법론인 Planning for ROI가 대홍기획/DDK에 전파되었다. Dr. Bill Wells 와 DDB Chicago의 짐 크리민스 등이 만들고 다듬어온 이 전략은 세계의 수많은 광고회사들이 부.. 더보기
#12 DDB 연수 (2) #12 DDB연수 (2) 나는 연수 가기 전에 미국 광고회사의 직급, 직책, 조직 등 매우 궁금했다. 도대체 부사장 타이틀 들은 왜 그리 많은지도 밝혀보고 싶었다. 부사장을 뜻하는 Vice President 도 그냥 Vice president라고 쓰인 친구도 있고 Senior Vice President라고 쓰인 친구도 있었다. 또한 Executive Vice President도 있었다. 우리나라 대규모 광고회사로 대입시켜 보면 임원 레벨이 EVP였고 본부장, 국장 레벨이 SVP, 팀장 레벨이 VP라고 해석하면 된다.DDB 시카고 오피스는 당시에도 700명이 넘는 대형 오피스였다. DDB의 본사는 뉴욕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크고 이익을 많이 내는 오피스가 바로 DDB 시카고 오피스였다. 그런데 700명.. 더보기
#11 DDB 연수 #11 DDB 연수(1) 나는 95년 무렵부터 미국에 가서 MBA과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실력 있는 후배들이 들어올수록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그런 의사를 임병철 본부장님 에게 말씀 드렸다. 그래서 내 이슈가 경영진 사이에서 얘기가 되다가 DDB 라인으로도 얘기가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과 한국의 책임자인 데니스 리치몬드가 서울로 와서 나와 미팅을 했다. 데니스 리치몬드는 나를 설득했다. MBA를 해서 DDB같은 회사 들어오는 건데 너는 이미 DDB에서 일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DDB 연수를 제안해 왔다. 데니스는 당시 대홍기획의 강정문대표에게 나의 연수를 제안했고 강정문 대표는 흔쾌히 승인해 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DDB 연수는 실행되게 되었다.총 6개월간 미국의 시카고.. 더보기
#10 하이트맥주 런칭 캠페인 #10 하이트 맥주 런칭 캠페인 우리나라 맥주시장은 동양맥주와 조선맥주의 두 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동양맥주는 같은 그룹 광고회사인 오리콤이 계속 대행해 왔고 조선맥주는 제일기획이 주로 대행했었다. 대홍기획은 80년대 중반부터 조선맥주를 공략했다. 먼저 조선맥주가 들여온 칼스버그 맥주 광고를 대홍기획이 대행하게 되었다. 대홍기획은 칼스버그 광고를 멋지게 제작하고 운영해서 조선맥주의 메인 브랜드인 크라운맥주 광고까지 맡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이었다. 나는 담당 AE를 맡기도 하였다.DDK가 되어서도 조선맥주를 계속 담당했다. 조윤기씨와 박종우군이 주로 담당했고 나는 팀장 역할이었다. 92년부터 신제품의 광고 대행을 놓고 대홍-DDK와 제일기획은 치열한 경쟁에 들어갔다. 결국 대홍-DDK는 신제품 대행권.. 더보기
#9 외국인 스텝 #9 외국인 스텝 90년대 초반에 한국으로 물밀 듯 들어오는 글로벌 광고주를 유치하고 광고를 담당하기 위해서 외국인 스텝을 채용하게 되었다. 88올림픽 이후로 광고 홍보 분야의 외국인 전문가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해서 93, 94년 무렵에는 꽤 많은 Expat들이 서울에 있게 되었다. DDK에서 처음 맞은 외국인 스텝은 시드니에서 온 레스 에드워즈였다. 디디비에서 찾아 추천한 인물로 뉴질랜드 국적에 호주 시드니에서 일하던 AE출신의 광고인이었다. 레스 에드워즈는 처음 서울 왔을 때 37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레스 에드워즈는 이태원에서 술 마시고 싸우고 안경 잃어버리는 등 expat 사이에서는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레스 에드워즈는 5년 정도 같이 일하고 괌에가서 디디비 괌을 만드는 일을 3년.. 더보기